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할힌골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파일:external/1.bp.blogspot.com/Area+map.jpg|width=600]] ▲ 소련, 몽골, 만주 간 국경과 할힌골이 표시된 지도[* 참고로 저 때 [[중국]], [[몽골]], [[조선]]의 국경선은 지금과는 조금 달랐다. 지금의 중국-몽골 국경선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1950년 [[몽골 인민공화국]]과의 수교 이후에 확정되었다.] [[파일:external/www.pacificwrecks.com/kg-river-view-south.jpg|width=600]] ▲ 현재 할하 강의 사진 사건은 [[1932년]], [[만주국]] 성립시 일본 [[관동군]]이 [[만주국]]과 [[몽골]] 사이의 [[국경]]을 할하 강[* [[몽골어]]로 할힌 골(Khalkhyn Gol)이라고 부른다. '할하(Khalkha)'의 '강(Gol)'이라는 뜻. 그리고 지금 [[몽골인]]의 주류인 할하 몽골족이 바로 이 강 유역에서 일어났다.]으로 정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대해 전통적으로 할하 강 동쪽 16km 지점에 있는 노몬한[* [[몽골어]]로 "불법(佛法)의 왕"이라는 뜻이다.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은 이름으로 보인다.] 언덕을 경계선으로 간주하던 몽골이 반발하면서 갈등이 빚어졌다. 일본의 주장대로 국경선을 정하면 기존의 국경선에서 뾰족하게 튀어나온 돌출부를 형성하는데 그것이 몽골에는 잠재적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다. 해당 지역 자체는 모래와 잡초 투성이인 황무지여서 가치가 없었다. 또 만주국/일본과 몽골/소련이 주장하는 국경선의 차이는 약 10~20km 정도의 사소한 거리에 불과했다. 한 줌에 불과한 황무지를 놓고 굳이 무익한 싸움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으므로 협상으로 잠정적 국경선을 정하려는 움직임도 초기에 있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육군]]은 소련을 제1의 가상 적국으로 여겼으며, 소련 또한 [[러일전쟁]]에서 겪은 패배의 경험을 기억했던 데다가 [[적백내전]] 당시 개입했던[* [[시베리아]]까지 무려 7만여 명을 파병했다. 게다가 [[바이칼 호수]] 뒤까지 점령했다.] 일본의 야욕을 충분히 인지했으므로 이 부근을 매우 중시했다. 특히 [[일본군 육군]]은 [[만주사변]][* [[만주사변]] 당시 소련은 중립을 유지했고, 외무장관 막심 리트비노프는 분쟁을 일으키기 않기 위해 1931년 12월 일본에 상호 불가침조약을 맺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일본은 그것을 거부했고, 소련이 겁을 먹었다고 오판하였다(출처: Nomonhan, 1939: The Red Army's Victory That Shaped World War II).]이나 [[중일전쟁]]에서 보듯이 중앙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모험주의적인 충돌을 일삼았으므로,[* Nomonhan, 1939: The Red Army's Victory That Shaped World War II에서는 [[하극상]](Gekokujo)이 관동군의 두드러진 특징이었고, 일본 육군 교육 체계 자체가 [[소대]], [[중대]] 같은 소규모 단위 부대를 지휘하는 능력보다는 [[사단]] 같은 대규모 부대를 운용하는 능력을 배양하는데 치중했으며, 이러한 교육 하에 양성된 일본 육군 장교들은 중대장, 대대장 수준에 불과한 인물이어도 병력을 대규모로 운용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착각한 나머지 경거망동하는 경향이 심했다고 기술했다. 이러한 경향은 군에서 실질적인 방향을 결정한다고 할 수 있는 좌관급 장교단에서 특히 강했다. [[츠지 마사노부]]가 일개 소좌였을 때도 관동군 참모단 내에서 깽판칠 수 있었던 이유였다.] 소련은 망나니와 같은 일본군을 경계했다. 그동안 일본의 군사적 야욕은 관동군을 확장하면서 점점 노골화되었다. 소련은 관동군이 극동에서 어떤 깽판을 칠지 알 수 없었으므로 군비를 계속해서 증강했고, 관동군도 마찬가지로 소련의 군비 확장을 근거로 병력을 늘려 나갔다. * 1931년~1939년 양 군의 군비 확장 통계[* 출처: Nomonhan, 1939: The Red Army's Victory That Shaped World War II 해당 서적에 따르면 소련군이 양적으로 관동군을 한참 압도하기는 했으나 일본이 본토에서 관동으로 병력을 비교적 신속하게 충원할 수 있었고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중국 북부에서 차출이 가능했던데 반해 소련은 "극동"이란 지역이 워낙 넓은데다 산업 인프라, 인구가 밀집해 있던 러시아의 유럽 영토에서 극동 지방까지 병력을 충원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힘들었다. 주요 운송 수단인 [[시베리아 횡단철도]] 또한 만주국-소련 국경에 굉장히 가까워서 일본군이 얼마든지 파괴하는 것이 가능했기에 소련은 극동 주둔 소련군에게 중앙에서 조달되는 지원에 의존하기보다는 주둔지에서 자급자족하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 [clearfix] ||<-5> [[파일:소련 국기.svg|width=23]] '''극동 지방 소련군''' ||<-5>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width=23]] '''관동군''' || || 연도 || 총 병력 || 보병사단 || 항공기 || 전차 || 총 병력 || 보병사단 || 항공기 || 전차 || || 1931 || 불명 || 6개 || 불명 || 불명 || 6만 5천 명 || 1개 || 불명 || 불명 || || 1932 || 10만 명 || 7개 || 160기 || 250대 || 9만 4천 명 || 4개 || 100기 || 50대 || || 1933 || 불명 || 8개 || 300기 || 300대 || 11만 4천 명 || 3개 || 130기 || 100대 || || 1934 || 23만 명 || 11개 || 500기 || 650대 || 14만 4천 명 || 3개 || 130기 || 120대 || || 1935 || 24만 명 || 14개 || 950기 || 850대 || 16만 4천 명 || 3개 || 220기 || 150대 || || 1936 || 30만 명 || 16개 || 1,200기 || 1,200대 || 19만 4천 명 || 3개 || 230기 || 150대 || || 1937 || 37만 명 || 20개 || 1,560기 || 1,500대 || 20만 명 || 5개 || 250기 || 150대 || || 1938 || 45만 명 || 24개 || 2,000기 || 1,900대 || 22만 명 || 7개 || 340기 || 170대 || || 1939 || 57만 명 || 30개 || 2,500기 || 2,200대 || 27만 명 || 9개 || 560기 || 200대 || [clearfix] 1935년 1월에는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Khalkhyn_Temple|할하먀오 사건]], 1935년 12월에는 [[https://ja.wikipedia.org/wiki/%E3%82%AA%E3%83%A9%E3%83%9B%E3%83%89%E3%82%AC%E4%BA%8B%E4%BB%B6|오라호도가 사건]], 1936년 1월 말엽에는 [[https://ja.wikipedia.org/wiki/%E9%87%91%E5%BB%A0%E6%BA%9D%E4%BA%8B%E4%BB%B6|금창구 사건]], 같은 해 3월에는 [[https://en.wikipedia.org/wiki/Suiyuan_Offensive|타우란 사건]]이 발생했는데 해당 사건들 모두 양측에서 몇십 명 정도의 피해만 입었을 뿐 그다지 주목할 만한 사건들은 아니었다.[* 심지어 오라호도가 사건에서 일본군의 피해는 전사 8명, 부상 4명에 불과했다.] 이 때까지는 그냥저냥 흔한 국경분쟁이었다. 그러나 1937년 [[이오시프 스탈린]]이 [[대숙청]]을 시작하여 [[미하일 투하쳅스키]] 등 유능한 장성들을 대거 처형함에 따라 일본은 소련의 군세를 과소평가하기 시작했다. [[야스히토|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의 부관으로 유럽을 방문 중이던 일본군 참모본부 소속 [[혼마 마사하루]](1888~1946)[* 1936년 12월부터 유럽을 방문 중이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필리핀]] 침공을 주도했으며 [[바탄 죽음의 행진]]을 일으킨 전범으로 기소되어 [[도쿄 전범 재판]]에서 사형당했다.] 소장이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귀국하여 "소련군의 고위 지휘관이 숙청당했으며 이런 결과로 인해 소련군은 일본군에 상대가 되지 못할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올림에 따라 일본은 소련과 비교적 큰 규모의 군사적 충돌을 일으키는 것 또한 주저하지 않았다. 이후 비교적 큰 규모였던 2번의 무력 충돌이 연달아 터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